1. 한국의 잔다르크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업적
3·1운동의 역사적 인물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한국의 잔다르크’이며, ‘3·1운동의 꽃’이라 불리는 유관순 열사이다.
유관순(柳寬順)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제는 언니 계출(癸出)과 오빠 우석(愚錫), 그리고 두 동생 인석(仁錫)과 관석(冠錫)이다.
유관순의 본관은 고흥유씨(高興柳氏)로 조선 중기 광해군 때까지 중앙 정계의 관원을 지낸 명문사족이었다. 아버지 유중권은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유교적 전통을 고수했고, 숙부 유중무는 개종해 지령리 교회의 선교사가 됐다.
유관순이 태어난 때는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대한제국에 대한 정치·군사·경제적 이권을 확고하게 장학한 시기였다.
유관순은 기독교 영향을 받은 가정에서 출생하여 숙부인 유중무가 선교사로 일하는 매봉교회를 다녔으며, 앨리스 햄몬드 샤프(Sharp, Alice J. Hammond,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 부인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큰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매봉교회는 1901년경에 설립되었으며,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는 등 애국운동을 펼치자, 그해 11월 일병(日兵)의 방화(放火)에 의해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작은 할아버지인 유빈기(柳斌基, 1883-1928)는 케이블(E, M, Cable, 1874-1949, 한국명 奇怡富) 선교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조병옥의 부친인 조인원(趙仁元), 유관순의 숙부인 유중무 등과 1908년 이 교회를 재건하였다.
유관순은 키가 151.5cm로 작았으며, 어린 시절에 꽤 짓궂었고 지기 싫어했고, 고집스럽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다. 특히 어린 시절 유관순이 잘 불렀던 노래는 당시 마을 청년들이 부르던 우국창가로 ‘무쇠골격 돌주먹 청년 남아야…’, ‘샘물이 돌고 돌아…’란 가사가 인상적이다.
유관순은 매봉교회에서 찬송가를 배우고 한글을 깨우쳤다. 13세이던 1914년에 영명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2학년까지 수학하다가 미국인 선교사 앨리스 햄몬드 샤프(Sharp, Alice J. Hammond, 한국명 史愛理施) 부인의 주선으로 사촌언니인 유예도(柳禮道)가 재학하고 있던 미션스쿨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학교생활에서도 매우 모범적이었다. 동료와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음은 물론, 무슨 일이든지 솔선수범하였으며, 남을 위해 돕는 일에는 언제나 가장 먼저 앞장섰다.
또한 유관순은 매우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번은 친구와 한밤중에 태극기를 70여장이나 그려서 서양선교사의 방과 기숙사 학생들의 방, 그리고 교실마다 붙였다. 이로 인해 다음 날 소동이 일어났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정확한 태극기 그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1918년 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다.
유관순은 학당 생활과 교회 예배를 통해 나라 사랑과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 구국의 의지를 다졌다. 학당에서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하란사(河蘭史=金蘭史, 1872-1919)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정동교회에서는 기독교 정신과 독립정신에 기초하여 나라와 민족과 신앙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강조한 감리교의 손정도(孫貞道, 1872-1931) · 이필주(李弼柱, 1870-1942) 목사의 설교에 감화되었다.
훗날 손정도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됐으며 길림·북경·봉천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망명지에서 생애를 마쳐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이필주는 3.1운동 당시 감리교를 대표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생을 다하는 날까지 일제에 항거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2학년에 재학 중인 1919년 3월 1일 일제의 탄압과 감시, 수탈에 저항하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화학당 룰루 프라이(Lulu E, Frey) 학당장은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학생들이 시위대열에 참여하는 것을 강력히 제지하였다.
그러나 유관순은 5인 결사대에 참여하여 친구들과 함께 학교 담을 넘어 만세시위운동에 합류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3.1운동 이후 일본 경찰의 경계가 더욱 삼엄해졌으나 유관순은 3월 5일 학생단 시위에 또다시 참여했다.
▲ 유관순(뒷쪽 오른쪽)과 4촌 언니 유예도(뒷쪽 왼쪽 두 번째)가 이화학당 동급생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 제공=신앙과 지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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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나 학교 측에서 일제 경무총감부와 교섭하여 다행히 석방되었다.
다급해진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다. 유관순은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3월 13일 4촌 언니인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병천으로 향했다. 각 부락을 다니며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고, 4촌 언니인 유예도와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4월 1일(음력 3월 1일) 오후 1시 경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작은 아버지 유중무(柳重武), 조인원(趙仁元, 維石 趙炳玉 아버지), 조병호(趙炳鎬), 이백하(李柏夏), 김구응(金球應), 김교선(金敎善), 이순구(李旬求), 한동규(韓東奎), 홍일선(洪鎰善), 김상철(金相喆), 조만형(趙萬衡), 박봉래(朴鳳來), 김상훈(金相訓), 김용이(金用伊), 박제석(朴濟奭) 열사 등과 함께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천안, 진천, 청원, 연기 주민 3000여 명의 군중이 아우내 시장 거리를 뒤덮은 이날 오후 1시 30분경 독립만세시위 행렬이 아우내 장터 복판에 이르자 유관순은 쌀 섬 위로 올라가 우리나라 독립의 중요성과 반드시 독립을 쟁취해야 함을 연설하며, 군중을 독려했다.
“여러분!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도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가하였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그 다음 조인원 선생이 태극기를 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포암(逋巖) 이백하(李栢夏, 1899-1985) 선생이 기초한 326자의 아우내 장터 독립선언서를 우렁차게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고 감격과 흥분에 휩싸인 군중들은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만세시위를 격렬하게 벌였다. 유관순은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에 앞장섰다.
어느새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병천 일본헌병 주재소의 헌병들이 시위대를 제지했고,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큰 태극기 깃대를 쳐서 부러뜨리고 다시 옆구리를 찔렀다.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폭력 저지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결국 유관순의 부모님은 왜병의 총에 살해당했다. 뿐만 아니라 유관순도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날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순국한 분은 모두 19명이나 되었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柳愚錫, 1899-1968)은 공주 영명학교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의 칼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 ©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유관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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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장터 독립만세시위 이후 유관순은 시위 주도 혐의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이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이에 재판장은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그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다시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유관순은 “지금 조선 천지에 감옥이 아닌 곳이 어디냐”며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유관순은 그곳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중 3.1운동 1주년을 맞던 1920년 3월 1일 이신애(李信愛, 1891-1982), 어윤희(魚允姬, 1880-1961), 박인덕(朴仁德, 1897-1980, 이화학당 스승) 등과 옥중 만세 시위를 벌였다.
당시 서대문감옥에 갇혀있던 수많은 수감자들이 이 시위에 호응했다. 크게 당황한 일본 간수들은 시위 주모자인 유관순을 모질게 고문했다. 유관순은 이때 받은 가혹한 고문으로 방광이 파열됐다. 이를 알고도 일제 당국은 치료를 거부하고 방치했다.
감옥 안에서 함께 수형했던 어윤희 여사는 유관순이 배고픔,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일제는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과 일본 왕실의 니시모토 마사코(梨本宮方子, 이방자)의 결혼을 계기로 5,000여 명의 한국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다. 유관순은 이때 형기 절반인 1년 6개월을 감형받고 1921년 1월 2일 출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유관순의 몸은 일본인 간수들의 가혹한 고문으로 회생할 수 없을 만큼 상처가 많이 나 있었다. 1920년 영친왕의 결혼식으로 특별사면을 받은 유우석이 이화학당의 월터(A. Jeannette Walter) 선생과 서대문감옥 면회실을 찾았을 때 유관순의 얼굴은 생기를 잃은 채 부어 있었고, 온 몸은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유우석이 유관순의 손을 맞잡자 그녀의 손에 생긴 자국이 눌린 채 원래 모습으로 돌아기지 않았다. 썩어가면서 탄력을 잃은 살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유우석과 월터는 유관순이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가출옥시켜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일제는 거절했다.
일제에 한 치의 굴함이 없던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그렇게도 목메어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짧지만 숭고했던 생애를 마감하고 17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서대문형무소 측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이 인터넷, 위인전 등지에서 거의 전설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1949년에 만든 영화 <유관순>에서 처음 비롯된 말이다. 소설가 조흔파도 <왜경고문비화>에서 ‘시신 훼손설’을 주장했으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도 2006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8주년 심포지엄에서 유관순 시신 훼손설을 언급했다. 그런데 언론인 정운현은 이정은 저서 등을 인용해 ‘시신 훼손설’을 반박했다.
유관순이 죽은 지 10여 일이 지난 10월 12일, 이화학당 장인 웰터(A. Jeannette Walter) 와 김현경 선생과 오빠 유우석 등이 시신을 수습하고 인수하여 이화학당으로 모시었다.
출옥일로부터 삼일 째 되는 10월 14일, 일제의 탄압으로 오빠 유우석과 작은 할아버지 유빈기, 그리고 같은 반 학생 대표 몇 명만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유관순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식은 정동교회에서 김종우(金鐘宇, 1884-1939) 목사의 집례로 진행되었다.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비석도 표지도 없이 묻혔다. 얼마 후 공동묘지는 일제가 추진한 도시개발로 사라져버렸다. 애석하게도 유관순의 무덤은 파헤쳐졌고 다시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유관순의 순국 후 그녀의 집안사람들은 일본 경찰의 주요 감시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유관순 집안에서 독립유공자가 무려 9명이나 배출되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조국 독립에 대한 확고한 자각과 항일 구국관을 가지고 아우내 항일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유관순 열사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여러 가지 추모사업을 벌였다.
▲ 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복원된 유관순 열사 생가 © 신상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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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9월에는 이화학당 출신으로 유관순 열사의 스승이었던 박인덕과 이화여중고 교장 신봉조가 이화학당을 널리 알리고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친일행위를 덮기 위해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를 구성했고, 1951년에는 순국의 열사 심사위원회가 유관순을 순국의열사로 선정했다.
1974년에는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고, 1989년 10월에는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조성했다. 유관순의 묘에 있는 석관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 1991년에는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1996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정부는 열사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에는 추모각을 건립했고, 1972년 10월 14일에는 추모각을 사적 제 230호로 지정했다. 또한 기미년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2월 26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에서 현장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유관순 열사가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고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김형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은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석주 이상룡(1858∼1932)도 3등급인데, 유관순을 3등급에서 1등급으로 격상해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것은 형평성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1963년 3월 1일에는 부친 유중권·모친 이소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해 공훈을 기렸다.
그리고 2014년에는 유관순의 신앙적인 면을 다룬 영화 ‘소녀의 기도’를 개봉했고, 대한민국 해군은 2015년 3월 1일 손원일급 잠수함 6번함의 함명을 유관순함이라 명명하였다.
여성으로는 최초로 한국 해군함의 함명으로 결정된 것이다. 2019년 3월에는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유관순의 동상 앞에서 헌화예배를 하기도 했다.
또한 해마다 2월 28일에는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충남 천안시 서북구 쌍용2동의 충무병원 앞에 유관순 동상이 서있고, 서북구 백석동에는 유관순 체육관이 위치해 있으며, 동남구 백석대학교에는 유관순연구소가 개설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미국의 권위 있는 신문 뉴욕타임즈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2018년 3월 28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10대 순교자’라는 제목으로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는 기사를 실어 유관순 열사를 간과해서는 안 될 세계적인 여성지도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2019년 1월 미국 뉴묙주 의회 상원과 하원이 3.1운동과 유관순 열사를 기리며 '3.1운동 100주년의 날'을 선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유관순 열사의 의로운 기개가 세계적으로도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2. 유관순 열사의 항일독립정신의 기반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은 병천 지역의 반일정서와 고흥유씨 가문의 기독교 신앙과 삶 속에서 경험한 항일독립정신에서 출발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기미년 3.1운동 당시 목천군 일대는 산세가 험한 곳으로 일본에 의해 해산된 군인들과 독립군이 활약했고,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애국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한 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굽히지 않고 관철하고야마는 성격을 지닌 유관순은 이러한 고흥유 씨 가문의 기독교 신앙과 향토의 반일정서와 애국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배일애국사상을 싹틔웠으며, 기울어가는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희생해야 한다는 굳은 의지와 신념을 키우게 되었다.
최태육(1965년 출생) 목사는『진천감리교회 90년사』를 쓰기 위해 2006년부터 충북 진천과 충남 천안 일대를 답사하며 지역의 기독교 및 선교 역사를 연구했다. 이후 10여 년간 50여 차례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지령 마을과 유관순의 6촌 할아버지인 유빈기와 숙부인 유중무가 세운 지령리(용두 1리) 매봉교회의 흔적을 발견했다.
▲ 천안시 병천면 용두1리에 위치한 매봉교회 전경 © 신상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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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육 목사는 26일 “지령리 매봉교회가 있던 당시 목천군에선 정미의병과 일본 토벌대의 전투, 일본의 ‘직산 금광’ 침략 등 일제의 수탈이 구체적으로 자행됐다”며 “특히 일제의 만행 앞에 무기력한 관청 관리들의 모습에 실망한 주민의 상당수가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1907년 10월 일본군이 이곳 예배당에 불을 질렀다는 보도가 있었다”면서 “지금은 사라진 지령리 매봉교회 서까래에서 불에 탄 흔적을 봤다는 지역 어른들의 증언에 비춰 보면 지령리 매봉교회의 저항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07년 8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국채보상의연금 수입광고’에서도 유중무 등 ‘지령야소교당’ 교인 82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최태육 목사는 특히 1908년 1월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케이블(E, M, Cable, 1874-1949)이 주도한 부흥사경회에 주목했다.
당시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눈물로 회개하며 생활을 바꾸겠다고 결심하는 자기 갱신 운동이 일어났다. 최태육 목사는 “어린 유관순도 그 자리에 참석했을 것”이라며 “실제로 복음을 받아들인 유관순의 할아버지 유윤기는 종과 머슴을 풀어주며 봉건계급 철폐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이렇게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복음이 1919년 4월 유관순과 집안 사람들이 병천 아우내와 공주읍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는 매우 컸다. 유관순의 사촌 언니 유예도를 도피시킨 사촌 오빠 유경석과 올케 노마리아(대구여자경찰서장 역임)는 일제로부터 갖은 괴롭힘을 당했다. 그럼에도 유관순 가문은 끝까지 신앙과 독립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최 목사는 그해 6월 16일 집안의 기둥이던 어른 유윤기(柳閏基)가 사망한 뒤 7월 9일 충청남도 장관 구와하라 아츠시가 조선총독부 내무부 장관 우사미 가스오에게 보낸 보고서를 찾아냈다.
한반도통일연구소 최태육 목사는 “보고서를 보면 기독교 때문에 일가가 멸족됐으니 유윤기(柳閏基)를 전통방식으로 장례 치르자는 집안 사람들에 맞서 유관순 집안의 사람들은 기독교식 장례를 고수했다”며 “이들은 민족의 독립과 기독교인의 각성을 통한 복음화가 꼭 이뤄진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유중무와 그의 아들 유제경,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그의 아내 조화벽에 이르기까지 유관순 가문의 사람들은 신앙의 토대 위에서 일제에 저항하며 살았다.
최태육 목사는 “유관순 가문의 정신과 삶은 진정한 헌신과 희생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준다”며 “이들이 보여준, 민족과 기독교 신앙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3. 유관순 열사에 대한 과대평가 의혹과 근거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3·1운동과 관련돼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학생 71명 중 옥중시위를 주도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2심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받았던 형량과 동일한 가장 무거운 3년 징역형을 받았으며, 감옥에서 순국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그의 불굴의 항일독립정신은 북한도 높이 평가해 역사책에 싣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국민이 유관순을 3․1운동의 상징으로 여긴다.
그런데 유관순이 자신이 한 업적에 대비에 너무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의견과 부정하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2014년에 선보인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4종이 유관순을 다루지 않고 있다.
최근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친일 전력이 있는 박인덕이 발굴해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연구 성과가 있어 교과서에 기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유관순 열사가 3.1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걸고 항일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옥중에서 순국한 것은 맞지만 3.1 운동 당시에도, 그 이후로도 수십 년간 무명의 참가자에 불과했었다.
실제로 1945년까지 발행된 모든 신문기사에서 유관순의 이름은 1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오히려 여성 독립운동가 중 1920∼30년대 근우회나 여성동우회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당대 이름이 알려졌던 신여성 엘리트들이 많다. 유관순은 1947년부터 갑자기 국내 신문에 자주 등장하며 영웅서사를 갖게 된다.
유관순은 1947년 2월 28일 『경향신문』에 실린 소설가 박계주의 ‘순국의 처녀’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그리고 1945년 광복 직후부터 3년 동안 대한민국 최초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를 만든 박창해(朴昌海, 1916-2010) 미군정청 교과서 편수관과 같은 사무실에 근무했던 유관순의 조카인 유제한 편수사(국어학자)가 유관순을 제보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이화여중고 교장 신봉조는 일제 말기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한국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다.
이화학당 출신의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던 박인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죄과를 덮으려 했고, 그에 딱 알맞은 인물로 유관순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 몰두한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신봉조가 박인덕에게 “3.1운동에 참여한 200여 명의 이화학당 출신 중에 특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 많이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유관순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1947년 9월에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 기념사업회는 유관순 모교인 이화 출신 ‘친일’ 인사들도 참여했지만 독립지사, 동향(同鄕) 및 고흥 유씨 친족 인사들이 적극 참여해 발족됐다. 영화 <항거>, <1919 유관순>과 전기 제작도 동향 인사 및 친족들이 있어 가능했다.
1947년 11월 27일 천안 병천의 아우내만세운동기념비 제막식 날, 김구·이시영·유제한 등 우파 독립지사들은 유관순 추도사를 헌정했다. 이들은 추도사에서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 상황에 대해 순국선열에게 죄스러움을 보이며 민족 통일 즉 완전 독립 완수를 맹서했다.
그리고 유관순이 ‘호국의 신’ ‘겨레의 수호신’이 되어 도와주길 기원했다. 특히 유관순의 조카로 국어학자인 유제한은 추도사에서 ‘기념사업회는 남북 분단의 위기 상황에서 유관순을 통해 애국심을 고양시켜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다’고 단언했다.
해방 직후 박창해와 함께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를 집필하고 1948년에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인 『순국처녀 유관순전』을 펴낸 소설가 늘봄 전영택(田榮澤, 1894-1968)은 문교부 편수국 편수관으로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다.
유관순 발굴 띄우기 과정과 기념사업회 결성과 모든 기념사업 배경에는 남북 분단 위기 상황에서 애국심을 고양시켜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목적이 있었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7,500명이다. 유관순 열사 역시 운동을 이끌다가 옥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유관순 열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열사들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나머지 7,500여 명의 열사 분들이 희생당했다는 것도 후세에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박은식의 주장 외에 일본 측의 기록을 보아도 3개월간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으로 나온다.
유관순은, 사망자가 아닌 구금자 46,948명 중의 한 명인 것이다. 유관순이 사망한 것은 일제의 3.1운동 진압과정이 아니라, 감옥에 수감된 1년 6개월 후인 1920년 9월 28일이다.
유관순이 훈장을 받는다면, 그에 앞서 3.1운동중 사망한 7,509명에게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훈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7,509명의 사망자 안에는 유관순의 부모님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두 사람은 건국훈장 애국장 (4급)을 추서하였다. 죽은 부모님은 4등급 훈장, 살아남은 딸은 1등급 훈장이다. 독립운동 과정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왜경에게 잡혀서 옥사한 사람에게 더 높은 훈장이 수여된 것이다.
그리고 3.1 운동 당시 오히려 민족대표 33인과 유관순이 받은 3년 징역형보다 당시 현장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훨씬 높은 형량을 받았었다.
또한 무엇보다 왜 기독교는 유관순 열사만 띄우고, 불교의 독립운동사는 왜 말이 없느냐고 반문한다.
그런가 하면 이화학당 출신 항일독립운동가들 중에 이화학당 1회 졸업생 중 한 명인 신마실라, 이태영 변호사, 황애시덕, 허정숙, 권애라, 이애라, 최복순, 현앨리스 등이 있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특히 허정숙, 권애라, 현앨리스 등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만약 유관순 열사가 살아서 1920-30년대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면 결코 지금같은 애국 아이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1920년대 신여성엘리트로 활동하거나, 1920년대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그랬듯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을 수 있는데, 그랬다면 절대 지금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없다.
4.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주도자들 균형적으로 재조명해야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주도자로는 조인원, 이백하, 유중무, 김구응, 유관순, 유중권,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이순구, 조만형, 박봉래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런데 지난 100년 동안 전 국민에게 유관순 열사만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주역으로 조명을 받는 바람에 다른 독립투사들은 까맣게 잊혀 안타깝다.
그리고 아직까지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원본을 찾지 못하고, 구국동지회의 실체를 밝히지 못해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안시와 국가보훈처는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하여, 유관순 열사의 빛에 가려 잊힌 주도자들을 재조명하고, 전국적으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원본 찾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로 하여금 구국동지회의 실체를 밝혀내고, 2009년 천안시 병천면 병천리 일원에 조성된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에 독립선언서 전문을 새겨 놓은 기념비를 건립해야 한다.
<참고문헌>
1. 이정은,『유관순: 3.1운동의 얼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역사마당. 2004.
2. 조한필,「유관순 발굴과정 검토」,『백산학보』, vol., no.113, 2019.
3. 이덕주·최태육,『유관순 가(家)의 사람들』, 신앙과지성사, 2019.2.15.
4. 공주시·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 공주가 키운 유관순과 공주의 여성독립운동가』, 서경문화사, 2020.12.18.
5.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유관순 열사의 생애 (1902-1920)”, 유관순 열사 일대기, 2021.2.16.
6. “유관순”, 네이버 나무위키, 2021.2.20.
7. 이정은,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중앙일보, 2011.3.1일자. 6면
8. 홍찬식, “‘순국처녀 유관순’ 발굴의 진실”, 동아일보, 2014.9.11일자.
9. 신상구, “유관순 열사의 스승 김란사의 생애와 업적”, 중앙매일, 2016.3.3일자.
10. 김나래, “유관순 가문은 신앙·저항정신의 뿌리였다”, 국민일보, 2019.2.27일자.
11. 신상구,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 주도자들 균형적으로 재조명해야”, 금강일보, 2019.4.18일자. 2면.
12. 김병한, “유관순 열사 선양, 역사적 정당성 있다”, 충청일보, 2019.5.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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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 아호 대산(大山) 또는 청천(靑川), 본관 영산신씨(靈山辛氏) 덕재공파(德齋公派)
-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 <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 주요 논문: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93편
- 주요 발굴 : ▲민촌 이기영의 천안 중앙시장 3·3항일독립만세운동 기록(2006) ▲포암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2007)
- 수상 실적: 예산군수 감사장, 대천시장상(2회), 천안시장상(2회),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2회) 교육부장관상(푸른기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문학 21』시부문 신인작품상,『문학사랑』·『한비문학』 문학평론 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칼럼/기고 활동: 동아일보·중앙일보·조선일보·경향신문·한국일보·서울신문·서울일보·신아일보·문화일보·전국매일신문·시민신문·천지일보 등 중앙 일간지, 대전일보·충청일보·충청투데이·중도일보·동양일보·금강일보·중부매일·충남일보·중앙매일·충청타임즈·충청매일·대전투데이·충청신문·충북일보·우리일보·시대일보·중부일보 등 지방 일간지, 충남시사신문·천안일보·충남신문·천안투데이·아산투데이·아산시사신문·예산신문·태안신문·태안미래신문·보령신문· 내포시대·진천신문·증평신문·옥천신문 등 주간신문, 아산톱뉴스·천안일보·디티뉴스·대전뉴스·충청뉴스·충청뉴스인·시티저널·충북인뉴스·굿모닝충청·예산뉴스 무한정보·괴산타임즈·코리안스프릿 등 인터넷신문 등에 수백편의 칼럼 기고.
- 방송활동: 30년 간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환경운동 전개, KBS 중앙방송국 라디오 <논술 광풍>프로 출연, STB 상생방송 <홍범도 장군> 프로 출연, KBS 대전방송국·MBC 대전방송국·CJB 청주방송국 라디오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발굴> 프로 출연.
- 대전 <시도(詩圖)> 동인,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충남민주시민교육연구회 회원, 한국사회과교육연구회 회원, 한국국민윤리교육회 회원, 천안향토사 연구위원,『천안교육사 집필위원』,『태안군지』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위원, 통합논술 전문가, 평화대사, (사)대한사랑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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