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korean war, 1950.6.25-1953.7.27) 발발 68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내가 한국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인 1950년 음력 6월 26일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에서 태어나 많은 고초를 겪었고, 아버지인 고 신종순(辛鍾淳, 1931.12.2-2010.4.13)님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임실호국원에 부친인 고 신종순님과 모친인 고 유옥임(兪玉任, 1928.2.24-2015.10.30)님의 시신이 합장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어, 6월 호국보훈의 달은 나에게 남다른 감회를 갖게 한다.
그리하여 한국전쟁 발발 68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걸고 소중한 우리 문화재(文化財, cultural properties)를 지켜낸 영웅들의 공훈을 기리는 칼럼을 급히 작성해 특별기고 하게 되었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9000년의 유구한 민족사를 이어오는 동안 930여 회의 외침을 당했고, 수많은 내란과 민중봉기가 발생하여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고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약탈을 당했다.
특히 7년간의 임진왜란, 36년간의 일제강점기, 3년간의 한국전쟁 도중에는 수많은 문화재와 사서(史書)가 파괴되거나 약탈되어 한민족의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고, 정통국사 광복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2008년 6월에 발간한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를 보면,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걸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낸 영웅들이 소개되어 있어 우리 한민족으로 하여금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한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은 화엄사를, 장지량 공군 장교는 해인사 장경판전을, 미국 공군 제임스 헤밀턴 딜 중위는 덕수궁을, 김용주 주일대표부 특명전권공사는 남대문을 목숨을 걸고 지켜내 한국 문화재사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5년인 544년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한 화엄사(華嚴寺)는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노고단 남서쪽에 있는 사찰로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5호로 지정되었다.
이 사찰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로 한국 화엄종의 총본산이자 화엄사상의 상징으로 불교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공양한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石燈),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 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금정암(金井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이 중 국보 제67호인 화엄사 각황전(覺皇殿)은 한국 불교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며, 각황전에서 떨어진 돌조각인 화엄석경(보물 제1040호)은 부서진 것일망정 보물로 지정될 만큼 그 문화재적·사료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다.
빨치산 남부군을 토벌하기 위해 지리산에 도착한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車一赫, 호적상 이름 차갑수, 족보상 아름 차용철, 1920-1958)에게 빨치산의 은신처로 이용되고 있는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문짝을 뜯어내 법당 앞에서 소각하는 걸로 명령을 대신한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화엄사를 함부로 태울 수는 없었다. 차일혁은 화엄사만이 아닌 천은사, 쌍계사,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과 덕유산의 사찰 등 전라도의 수많은 사찰들을 지켜내 오늘날의 우리가 천년 고찰들을 만날 수 있게 했다.
차일혁 경무관은 6.25전쟁 전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화산(火山) 이현상(李鉉相, 1906-1953)이 지휘하던 좌익 빨치산 부대인 남부군(南部軍) 토벌작전에서 70명으로 2000여 명의 적을 무찌르는 등의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아 훈장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차일혁 경무관의 아들 차길진(車吉辰, 1947년 생) 사단법인 후암미래연구소장이 차일혁 경무관이 남긴 수기 ‘진중기록(陣中記錄)’을 바탕으로 10여 년간 지리산일대를 탐문하여 역사에 묻혔던 지리산 빨치산들의 행적을 밝혀내 단행본인 <또 하나의 전쟁-빨지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기록>(후아이엠, 2014.9.4) 을 발간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월간중앙(1989년 8월) 논픽션 부분에서 우수작으로 당선되었으며, 복간된 월간 <다리>지에 ‘빨치산 토벌대작전’으로 연재된 바 있다. 그리고 공영방송인 KBS는 2012년 6월 28일 밤 10시에 차일혁 경무관이 남긴 ‘진중기록’ 내용을 바탕으로 기획된 KBS 역사 스페셜 ‘포화 속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 차일혁 경무관 특집’을 6.25 특집으로 방영해 차일혁 경무관이 6ㆍ25전쟁의 후방지역 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공훈을 기렸다.
▲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를 맡고 있던 장지량. © 아산톱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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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해인사(海印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서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4호로 지정되었다.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 :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는데, 한국전쟁 중 3차례의 폭격을 당한다.
그럼에도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제52호,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온전하게 건사,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석은(石隱) 장지량(張志良, 1924-2015)'의 목숨을 건 '해인사 폭격 명령 불복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8월에 경남 사천에서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를 맡고 있던 장지량에게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미 공군작전본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당시 600명 가량의 인민군 1개 대대가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었다. 미군에게 한국의 문화유산들은 별 가치가 없었던 것. 하지만 장지량은 고민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한 장군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 무조건 항복한 사실도 있지 않은가. 팔만대장경이 어떤 문화재인데 인민군 몇 명 잡자고 해인사를 폭격하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고민하기 시작, 명령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해인사를 지킬 것인가. 긴 고민 끝에 그는 명령을 거부하기로 한다. 언쟁과 출격 독촉이 계속되지만 그는 거부하는 걸로 시간을 끌어 의도적으로 출격의 때를 놓친다. 그 후 인민군이 철수할 때를 기다려 공격을 해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미군은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에게 장지량이 명령을 어긴 것을 항의, 이승만은 사살 명령을 내린다.
차일혁과 장지량의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관은 단지 개인의 불만으로 국보에 방화를 하는 우리 시대 문화재에 대한 가치부족을 부끄럽게 한다. 초토화 서울 수복작전을 바꾼 '제임스 헤밀턴 딜'과 '김용주'도 문화유산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람들이다.
서울 수복작전에 참가한 포병장교인 미국인 제임스 헤밀턴 딜(James Hamilton Dill) 중위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남달라 앤더슨 대위와 상의를 하여 북한군 수백 명이 주둔해 있는 덕수궁(德壽宮)을 폭파하라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의 명령을 어기고 북한군이 모두 빠져 나와 을지로를 지날 때 공격함으로써 덕수궁을 지킨다. 전쟁 중이지만 이국인(異國人)인 그에게 덕수궁은 ‘한 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왕궁’이었던 것이다.
그는 뒷날의 회고록인 <폭파 위기의 덕수궁>(국방군사연구소, 1996)에 남긴 1950년 9월 25일자 수기에서 이때의 정황을 자세히 묘사한다.
“초조한 시간이 한참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측자의 보고가 들어왔다. 적군이 덕수궁을 빠져나와 을지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1초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사격지휘 소대를 불러내 포격 개시를 지시하였다. 오늘날 덕수궁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흐뭇함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날 그 시점에 내렸던 판단과 행동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전쟁 중이지만 한 나라의 왕궁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지라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고자 시시각각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이국인의 고민에 숙연해졌다.
또 한 사람 김용주(金龍周, 김무성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부친), 한국전쟁 당시 주일공사였던 그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인민군과의 치열한 접전이 불가피한 서울을 폭격한다는 소문에 도쿄에 있는 맥아더사령부를 찾아가 문화재의 중요성을 피력, 서울 폭격 계획을 철수해 줄 것을 간청한다.
밀고 당기는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그는 작전상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서울 폭격을 얻어낸다. 정동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곳을 선으로 이어 그으며 그가 맥아더 사령부에 강한 동그라미를 그려 몇 번이고 거듭 강조한 곳은 덕수궁과 남대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덕수궁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정동이나 남대문(南大門) 일대의 명동성당이나 한국은행(현재 화폐금융박물관)처럼 한국 근대의 역사가 담긴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제임스 헤밀턴 딜과 김용주의 문화유산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과 이를 지켜내고자 했던 고민 덕분이다.
김용주의 남대문에 대한 애정은 사라진 남대문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이 외에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의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상원사(上院寺)를 지킨 방한암(方漢巖 : 법명 重遠) 스님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6.25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들이 상원사를 떠났으나 방한암 스님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일사후퇴 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다.
방한암 스님은 군인들에게 잠간 기다리라고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가지고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뒤 불을 지르라고 했다. 장교가 “스님 이러시면 어떡합니까”라고 말하자, 방한암 스님은 “나는 부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하며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오늘날 상원사 법당이 남은 것은 오로지 방한암 스님의 덕이다.
상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월정사와는 이웃하고 있다. 원래의 절은 724년(신라 성덕왕 23)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었고, 통도사(通度寺) 등을 창건한 자장(慈藏)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종각(鐘閣)만 남고 건물은 8·15광복 후에 재건한 것이다. 현존 유물 중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36)이 있다.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전 5권, 2004년)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 문화유산 최대 가해자는 미군과 한국군이다. 혹자들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위험한 상황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이유를 앞세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즉 소각과 폭격이란 같은 위험에 처해 어떤 문화재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어떤 문화재는 한 군인의 재량으로 오늘날 건재한 것을 보면서 소각과 폭격만이 최선이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해인사 창건 후 화재로 수차례 중건, 한국전쟁 당시 3번의 폭격에도 살아남은 유일한 조선 초기 건물인 해인사 장경판전. © 아산톱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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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는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사재를 털어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선비 물재(勿齋) 안의(安義, 1529-1596)와 한계(寒溪) 손홍록(孫弘祿, 1537-1610)을 비롯하여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독도를 지킨 안용복(安龍福)과 독도의용수비대, <직지심체요절>을 발굴한 박병선(朴炳善, 1928-2011),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를 지킨 사람들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일반인들로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문화재들을 사진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 또한 ‘왕조실록 기록부터 보관까지’, ‘목판활자와 금속활자의 비교’, ‘최근의 문화재 환수 운동과 성과’ 등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가들의 문화재 이야기도 실려있는 귀중한 서적이다.
<참고문헌>
1. 긴남식, 『남로당 연구』, 돌베개, 1984.
2. 김종환 구술, “용계당에 좌정한 용계은행나무 살린 처녀”, 『안동시사』, 안동시사편찬위원회, 1999.
3. 문화재청,『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 눌와, 2008.6.5.
4. 차길진, 『또 하나의 전쟁-빨지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기록』, 후아이엠, 2014.9.4.
5. 오동룡, “6·25전쟁의 火魔에서 서울 문화재 구한 金龍周 전 주일공사, 맥아더 원수 찾아가 “4대문 안 도심 보호해 달라” 간청“,『월간 조선』, 2014년 10월호.
6. 씨알마음, “방한암 스님”, 성현인물자료실, 2008.1.14.
7. 김현자, “6.25 포화에 목숨 걸고 문화재 지킨 사람들”, 오마이뉴스, 2008.6.25일자.
8.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네이버 두산백과, 2018.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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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 아호 대산(大山) 또는 청천(靑川), 본관 영산신씨(靈山辛氏) 덕재공파(德齋公派)
-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 <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 주요 논문: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93편
- 수상 실적: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문학사랑>·<한비문학> 문학평론 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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