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풀뿌리 지역언론이 필요한가? 
 
▲ 장호순 교수. 
우리 사회에선 지역언론이란 말조차 생소할 뿐만 아니라, 지역언론은 사이비언론이라는 선입견이 널리 퍼져있다. 한편 현재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주요 언론사는 서울에 모여있고, 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실상 존재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지방자치를 시작했지만 거대언론의 중앙집중 현상과 지역언론 경시 풍토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지역민방이 도입되고 지역신문의 허가제한이 폐지되긴 했으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뉴스나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습득할 기회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뉴욕이나 워싱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신문과 텔레비젼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어도, 우리가 사는 지역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언론을 통해서 알기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소수의 거대 중앙언론이 언론계를 장악하고 있는 현상은 예외적이고 병리적인 현상이지, 결코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며 바람직한 현상은 더욱 아니다. 언론은 그 자체의 속성상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고, 그래서 무조건 규모가 크다고 우수한 언론이라고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위성방송과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마셜 맥루헌이 예언한 지구촌이 현실화된 듯하지만, 전세계 대부분의 언론은 아직도 지역언론으로 머물고 있다. 물론 영화나 텔레비젼 드라마와 같은 문화, 오락 매체에 는 국경이 무의미해진 지 오래이다. 그러나 뉴스를 다루는 언론은 아직도 대부분 지역단위로 제작되고 있다. 1980년대 CNN을 시작하면서 테드 터너는 10년 내에 신문이 불필요해질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에도 거의 모든 미국인들은 아직도 1500개의 지역일간지와 1600여개의 지역 텔레비젼을 통해 뉴스를 접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언론이 지역매체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지역적으로 제한을 받는 동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직장, 학교, 시장 등 그생활반경이 50킬로미터를 넘기 힘들다. 그리고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뉴스와 정보는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 발생한 것들이다. 뉴스 편집자들이 뉴스를 선택하는 데 있어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근접성을 중요시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홍성에서 사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뉴스는 CNN이나 뉴욕타임스에 실린 뉴스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홍성지역에서 발생한 뉴스이기 마련이다. 지구촌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우선적으로 찾는 것은 전 지구에 관환 뉴스가 아니라 자기 지역에서 일어난 뉴스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에서 제작되는 방송뉴스와 중앙일간지들이 전국을 장악하고 있다 보니 각 지역에 거주하는 다양한 독자들의 기호와 필요에 맞는 뉴스를 제공하지 못해왔다. 전국지라면서도 취재하기 쉬운 수도권 중심의 뉴스로 대부분 지면을 채우고 있고, 지방도시나 농어촌 지역의 주민들의 뉴스는 대형사고가 터지지 않는 한 도외시되고 있다. 그러나 서울에서 발행된다고 해서 1000만명이 넘는 서울시민들의 다양한 뉴스 기호와 필요에 맞춰 다양한 기사가 제공되는 것도 아니다. 서울 사람들도 자신들의 생활주변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언론을 통해 정보를 얻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날씨를 제외하고는 중앙언론으로부터 일반 독자들이 자신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뉴스를 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실정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사회가 되었다. 신체에 비유하자면 동맥과 정맥만 있고 실핏줄은 없는 무기력한 인간이 된 것이다. 자신의 몸에 이상현상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이를 정확히 감지하고 치료할 수단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텔레비젼 뉴스와 일간지 기사를 통해 '교실붕괴'라는 끔찍한 뉴스르 접했지만, 실제 내 자식이 다니는 학교는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다. 콩나물에 농약이 듬뿍 들어있다고 신문과 방송에서 떠드는데 우리집 식탁에 올라오는 콩나물은 안전한지 알 길이 없다. 미국의 대통령 부인이 요즘 무얼하고 돌아다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우리가 뽑은 국회의원이 어떻게 국회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보건, 환경, 치안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안려주는 언론은 없는 실정이다.
  
왜 풀뿌리 지역언론을 억압하고 외면해왔는가?  

언론의 본래 형태인 지역언론이 우리 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은 일제시대 이후 지속된 집권층의 언론탄압 정책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제5공화국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이 땅을 통치해온 권력집단은 비판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언론의 숫자를 제한했다. 부도덕하게 집권한 정권은 비판의 목소리를 줄이고,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아 판단력을 둔하게 만들어야 했다. 우선 통제가 쉬운 지역언론을 봉쇄했다. 권력집단과 그들로부터 선택받은 거대언론은 국민들에게 언론이란 아무나 함부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거대한 적국적인 매체이어야 한다고 세뇌시켰다. 우리나라 언론의 거대화 신드롬은 신문의 이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외국의 권위있는 신문의 이름에는 대부분 도시이름(뉴욕타임스, 런던타임스, 프랑크루트 알게마이네 등)이 붙지만, 우리나라 신문은 거창하게 대륙이나 국가적 의미의 이름(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대한매일, 국민일보 등)이 사용된다.
 
이러한 지역언론 억압정책은 진짜 언론=중앙언론, 사이비 언론=지역언론이라는 왜곡된 도식을 우리 사회에 심어놓았다. 권력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중앙일간지들은 권력의 전횡과 부패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막대한 금전적 이익을 취득했다. 그들은 공정거래 질서를 어기고, 세금을 포탈하고, 광고시장을 독점했다. 1990년대 접어들어 언론시장의 개방화가 진행되었지만 군사정권 시절 기득권을 차지한 중앙일간지들이 여전히 전국시장을 독식하는 기형적 신문산업 구조를 지탱해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중앙언론은 민주주의 파수꾼이라기보다는 민주사회를 병들게 하는 거대한 암세포 조직이 되어버렸다.
  
중앙언론은 걸핏하면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우지만 정작 진실한 보도와 공정한 여론수렴을 위해 언론개혁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최근 빙산의 알각처럼 드러난 중앙언론 기자들의 부도덕과 오만도 결국 거대언론의 병폐를 보여주는 것이다. 권력과 결탁하고 시장자본에 종속된 거대 중앙언론매체는 기존체제를 옹호하면서 기득권세력의 이익을 보존하고 확장하는 데 몰두할 뿐이다. 그것은 자본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상업언론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기도 하다. 노동자와 농민을 대변한다는 <한겨레>조차 '외제차 시승기'를 싣고 증권투자와 아파트 분양기사로 지면을 채우는 것은 도시거주 화이트 칼라 중산층을 두된 구독자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언론매체는 다수의 구매자들이 요구하는 정보나 견해를 우선적으로 전달하기 마련이다. 설사 공동체의 건강성을 위해 필요한 뉴스나 정보라 하더라도 독자 다수가 시급히 원하지 않는 정보들은 배제되기 마련이다. 거대자본 언론은 소외와 배제를 조장하는 공동체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풀뿌리 지역신문의 현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 비록 아직 든든한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지만 -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에 풀뿌리 지역언론이 점차 확산되어 왔고, 언젠가는 이들이 거대자본 언론을 견제할 만큼 성장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풀뿌리 지역언론의 선두주자는 전국 각지 시-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이다. 이들은 지방도시의 토호세력들이 운영하는 지방일간지와 달리 시-군-읍 지역에서 지역주민 스스로 발행하는 주간 신문들이다. 적은 자본과 인원으로 제작, 배포가 가능한 지역신문은 1988년 정기간행물 등록법 제정 이후 그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우리나라 주간 지역신문은 대개 10명 내외의 직원이 5,000부에서 1만부 정도를 발행하고 있고, 전국적으로 약 500여개의 신문이 등록되어 있다.
  
비록 이들 중 일부는 중앙언론이나 지방일간지의 형태를 답습해 지역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대다수 지역신문들은 행정기관을 비판, 감시하고 지역 토호세력에 맞서 지역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무엇보다도 중앙일간지들이 외면해온 지역뉴스와 민초들의 애환을 지면을통해 제공하고 있다. 특히 <홍성신문>, <옥천신문>, <당진시대>, <해남신문>, <남해신문>, <서귀포신문> 등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합리적인 경영과 철저한 언론윤리의 실천을 통해 장차 우리 언론이 지향해야 할 개혁 방향도 제시하고 있는 진정한 풀뿌리 신문들이다.
 
건전한 풀뿌리 지역신문들은 행정기관의 홍보지도 아니고 토호세력의 정계진출 발판도 아닌, 지역주민의 관점에서 지역사회에 일어나는 일들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신문고 역할을 하고 있다. 풀뿌리 지역신문은 대부분? 주민주식의 신문 소유형태를 갖추고 있어, 소수 개인에 의해 지역여론이 왜곡되는 것을 근복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풀뿌리 지역신문사의 기자들에게는 촌지가 통하지 않고, 기사와 관련해 외부의 부당한 압력도 통하지 않는다. 편집권이 독립되어 공정한 보도가 보장괴고, 경영이 건실하고 투명해 사주가 지역 권력이나 광고주와 결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앙언론에 내재한 구조적 병폐와 부당한 관행을 철저히 거부하는 이들은 1996년 부터 <바른지역언론연대>라는 네트워크를 결성, 진보적 풀뿌리 지역신문의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사회에서 튼튼한 기반을 닦고, 언론의 정도를 걷는 지역신문은 아직 많지 않다. 대다수 지역신문이 적자경영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적은 인원과 낮은 보수로 인해 기자의 자질이 떨어지고 이직률이 높아 정상발행이나 질적 수준 유지가 어려운 상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지역신문이 아직 건실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지역신문 자체의 전문적 역량 부족, 지역언론에 대한 지역사회의 인식부족, 정부와 언론학계의 지원책 미비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지역언론인들은 언론인으로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지역주민들은 지역신문이 지역공동체의 재건에 필수적임을 깨닫고 지원해야 하며, 정부와 학계도 지역신문 없이 우리사회의 정치-경제적 발전을 더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적극적인 지역신문 육성정책을 펴야 한다.
  
풀뿌리 지역신문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풀뿌리 지역신문이 10명 내외의 직원이 1년 매출 2-3억원 정도를 올리는 영세기업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역할은 가히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우선 지역신문 없이 지방자치 실현을 기대할 수 없다. 언론 없이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의 단위를 국가단위에서 지역단위로 쪼개서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언론이 없다면 지방자치는 불가능하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제도를 고치고, 많은 예산을 투입하면서 지방자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그 결과가 미미한 이유는 지역 주민들의 여론형성과 참여를 촉진할 지역언론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역신문은 지역사회의 민주화에 필수적이다. 지역주민들의 현명한 정치적 선택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거대 중앙언론은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고는 시군구 단위 일꾼을 뽑는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를 효율적으로 보도할 수 없다. 지면이나 방송시간에 비해 소개해야 할 후보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반면 지역단위의 언론은 지역주민들이 지역사회를 위해 일할 유능한 일꾼을 선별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보다 정확하고 세밀하게 제공해줄 수 있다. 따라서 지역신문은 지금까지 후보자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언론매체가 없어, 혈연, 학연, 지연 등에 의존해온 불합리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게 한다. 나아가 선거비용을 절감시킴으로써 선거부정뿐만 아니라 만연한 정치인의 부정부패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지역신문은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우리나라 지역사회의 경제가 낙후한 원인 중의 하나도 지역언론의 부실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의 경제체제 하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계는 사실상 식민지 종속관계나 다름이 없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사람은 모두 도시로 빠져나가고, 중소도시를 장악한 자본의 이윤도 지역 내에서 재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서울로 되돌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농어민들이 생산하는 값싼 농수산물은 도시인들의 윤택한 생활에 기여하지만, 농어촌 지역으로 돌아가는 것은 도시인들이 외면하는 공해시설뿐이다. 지역경제의 주된 이익이 지역사회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원인 중에는 지역사회 내의 경제정보를 원활히 공급해주는 지역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는 탓도 크다. 지역경제활동에 필수적인 지역 내의 경제정보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 경제를 재건하려면 지역 내의 경제정보를 제공해주는 지역언론의 활성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신문은 지역공동체의 결속과 발전에도 필수적이다. 지역신문은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웃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공론장이 된다. 지역신문은 지역 내의 갈등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지역신문을 통한 지역 내 정보의 교환, 문제점 지적, 대안에 대한 토론 등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건강한 공동체의 형성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영호남간의 지역갈등뿐만 아니라, 한 시-군이나 읍-면 내에서도 지역적 위치에 따라 반목하고 질시하는 고질적인 지역감정도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공동체의식을 갖게 하는 지역언론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풀뿌리 지역신문이 성공할 수 있는가?  

지역신문의 필연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부분의 지역신문은 지역주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주된 이유는 지역주민의 필요와 기호에 맞춘 신문이 아니라 신문제작자들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권위주의형 신문이기 때문이다. 형태는 지역신문이지만 그 내용은 중앙일간지의 형태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지역신문은 독자중심형 신문으로 시급히 탈바꿈해야 한다. 독자들이 기사의 주인공이 되고, 독자들이 원하는 정보가 지면을 채우는 진정한 풀뿌리 신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지역언론의 최대 경쟁력인 독자들과의 밀접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지역신문이 지역주민들로부터 외면받은 또 다른 이유는 지역여론의 수렴장 역할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지역신문은 다양한 지역주민들의 견해가 왜곡되지 않고 반영되는 지역사회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개의 지역신문은 지역정치인이나 유지들의 사랑방이었지, 지역주민들이 참여하는 진정한 공론장인 경우는 드물었다. 이제부터라도 지역신문은 지역주민들이 마음을 여는 공간, 이웃 주민들을 알게 되는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5일 장터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이 지역신문의 지면을 통해 보다 많은 주민들에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신문이 지역사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려면 무엇보다 건강한 언론윤리로 무장해야 한다. 철저한 언론윤리 준수만이 지역언론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 주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신문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지역신문 중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는 <홍성신문>, <남해신문>, <옥천신문>, <해남신문>,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은 촌지수수 거부, 편집권 독립 등 철저히 언론윤리를 지킴으로써 지역사회에 신뢰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지역신문의 생존에 언론 윤리의 실천이 필수적인 것은 독자와 취재원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지역신문의 현실 때문이다. 
 
시-군 지역에서 발행되는 풀뿌리 지역신문이 다루는 뉴스들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거대도시에서 발생하는 뉴스와는 성질이 다르다. 중앙일간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독자들이 접해보지 않은 낯선 사람들이지만, 지역신문 지면에 소개되는 사람들은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이거나 한두 다리 건너면 연줄이 닿는 사람들이다. 지역사회에 주재하는 지방일간지나 중앙일간지의 기자들이 외지에서 일시 파견된 나그네들인 반면, 지역신문 구성원들은 대개 그 고장 토박이들이다. 이와 같은 지역신문과 취재원, 그리고 독자간의 밀접성은 취재보도상의 비윤리적 행위를 감추기 힘들게 한다. 중앙의 거대언론처럼 독자를 속이고, 취재원을 기만하면서 신문을 만들 수 없는 환경인 것이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촌지와 향응을 받고, 불공정한 기사를 싣는 신문은 이내 지역주민들로부터 낙인이 찍히기 마련이다. 
 
한편 이러한 지역밀접성 때문에 지역신문은 대도시의 거대언론과 달리 지역사회로부터 가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보다 많은 압력을 받기도 한다. 동창이라는 이유로, 친척이라는 이유로, 이웃이라는 이유로 특정 기사에 대한 청탁이나 압력을 행사해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역언론이 보도하는 사건들이 지역언론 종사자들과 직-간접적으로 이해가 얽혀있을 여지도 많다. 따라서 좁은 지역사회에서, 그리고 공과 사가 불분명한 우리의 관습에서 지역신문이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를 하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나라 500여개의 지역신문 중 성공한 지역신문을 손꼽을 정도에 그치는 것은 이러한 지역사회의 연고주의를 과감히 뿌리치지 못했고, 결국 지역주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풀뿌리 지역언론의 중요한 기능에도 불구하고 지역언론에 대한 우리사회의 관심은 아직 미미한 실정이다. 오히려 지역언론이라는 이유로 아직도 각종 차별을 하고 있다. 작은 것을 경시하는 의식구조와 아울러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수도권 중심으로 이루어진 제도와 관행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은 본래 지역단위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민주화된 사회일수록 거대 중앙언론보다는 지역언론이 발전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풀뿌리 지역언론의 확산은 거대자본 언론으로 인해 심하게 왜곡된 우리 언론계의 개혁을 가능하게 할 것아며, 중앙집중화된 권위주의 시대를 청산하고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진입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녹색평론 제50호 장호순 교수(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의 글 중에서...>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이곳에서 인생샷 어때요?”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